영화<다음 소희>는 정주리 감독이 배우 배두나와 함께한 두 번째 장편영화다.
<다음 소희>는 2022년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주목받으며, 국내에선 올해 2월 8일 개봉했다.
이 작품에 주목하는 이유는 씨네필(영화를 좋아하는 관객; 편집자 주)과 평론가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 10만5천여 명(3월 26일 기준)이라는 초라한 성적표 때문이다.
여전히 극장에서 상영 중이긴 하지만 좌석 점유율 0.1%(3월 26일 기준)로 흥행 역주행이라는 반전 스토리를 써내기엔 부족해 보인다.
이 작품은 15억 원의 제작비가 소요됐고, 극장 수입만으로 손익분기점을 넘으려면 50만 명 가까이 관객이 들어야 한다.
<다음 소희>는 펀드 투자금과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 제작지원금으로 제작된 독립예술영화로 분류되어 있다.
독립영화에서 볼 수 없는 스타인 배두나(유진 역)가 캐스팅되었으며, 다른 독립영화에 비해 블록버스터급 제작비가 투입되었다. 이 정도면 기대감도 있고 작품도 좋으니 잘 되었어야 한다.
2월에 562개의 스크린에서 9천여 회 상영되었다. 2월의 박스오피스 1위, 2위 작품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앤트맨과 와스프>였으며 이 둘은 각각 1,058개 관에서 8만3천여 회, 2,090개 관에서 8만 7천여 회 상영됐다.
한 달 동안의 상영 횟수로 비교하면 상업외화에 비해 10배 가까이나 차이가 난다. 단지 흥행 기대감이 없어서, 또는 관객이 들지 않기 때문에 상영 횟수가 적었던 것일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앤트맨과 와스프>의 개봉일자 스크린 수는 1천개관이 넘는 거와 비하면 확연한 차이다.
<다음 소희>에서 소희(김시은 분)가 실습생으로 콜센터 해지방어팀이라는 곳에서 사회 첫발을 들여놓으며 겪는 이야기다.
해지방어팀의 시스템이라는 것은 해지하고자 하는 고객을 속여 연장하거나 해지 못하게 뺑뺑이와 소위 ‘핑퐁작전’으로 28번이나 되는 횟수로 전화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고객으로 하여금 포기하게끔 만든 시스템이다.
이 자리는 당연히 ‘욕받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 자리에 어린 실습생을 앉혀놓고 헤드셋을 선물하는 것이 팀장이라는 기성세대이다.
실제로 콜센터의 상당수 사람들이 심한 스트레스로 정신과 치료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이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은 화장실과 흡연실밖에 없는 현실이다.
화장실도 자주 못 가게 하고 있어 방광염이 있는 직원이 많으며, 콜센터 여직원 흡연율은 30%가 넘는다고 한다. 흡연하려고 쉬는 것이 아니라, 쉴려고, 살려고 흡연하는 것이다.
당당하고 꿈 많던 소희는 ‘을의 세상’ 속에서 그녀의 인격과 삶은 점점 나락으로 추락해 간다.
잃어버린 꿈과 자아, 소희가 스스로 자기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외에는 없었다.
개인의 존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 거대한 사회 시스템은 가해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소희에게 차트 순위로 압박하며 실적을 강요했던 팀장? 그 팀장의 성적 매기는 회사 임원? 그런 회사에 취업률이라는 명분하에 소희를 보낸 선생님이나 학교? 취업률로 학교 순위를 매기는 교육청? 그 위에 교육부? 열악한 노동환경을 알면서도, 노동자가 아닌 실습생이라 교육부 소관이라고 떠넘기는 노동부?
소희의 죽음을 추적하는 형사 유진(배두나 분)은 죽음의 배후, 원인이 무엇인지 추적해 나가면서 이 거대한 사회부조리 속에 점점 무력해진다.
이 사회의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적확하게 이 영화에서 보여진다.
악의 평범성이란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이 부조리한 시스템을 들여다보면, 취업률, 할당률, 가입률, 방어율 등 퍼센티지(%)로 평가하는 정량적 평가라는 것이다.
경제적(돈) 가치를 효율성 퍼센티지로 표현하는 지표, 소위 돈이 되는 ‘실적지표’라는 놈 때문이다.
다시 독립영화의 평가로 돌아가 보자. 한국영화의 ‘실적’이라는 지표로 영화에 대한 스크린 수로 나타낸다고 하지만, 앞뒤 순서가 바뀌었다.
처음부터 스크린 수가 차이나질 않는가. 영화의 상업적 평가는 관객이 하는 것이 아닌가.
개봉하고 관객의 점유에 따라 스크린 수가 변화되어야 하고, 대다수의 독립영화도 충분한 기회가 얻을 수 있도록 처음 시작은 스크린 수가 공평하게 배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표에 표기된 극장 수를 보라. 대형 배급사 몇몇이 극장을 독점적으로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수익이라는 명분 하에 영화의 출발선부터 다르게 한다. 그 책임은 ‘을’이 져야 한다. 독립영화는 대기업이 참여하지 않은 이상 항상 ‘을’이었다.
<다음 소희> 역시 대기업의 상업영화가 아닌 독립·예술영화라는 프레임 속에서 소위 돈이 안 되는 영화라는 낙인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한국 영화가 조금이라도 발전하기 위해선, 대기업의 투자를 받지 않고 제작된 영화가 더 많이 제작되고 흥행도 되어야 한다.
<다음 소희>에서 유진이 교육청까지 찾아가 취조할 때 장학사(황정민 분)는 말한다. “취업률 떨어져서 교육청 지원이 끊기면 이 밑의 몇 개 학교는 그냥 문 닫습니다. 교육부가 취업률만 보니까요”
이에 유진은 “(한숨 쉬고는) 교육부요? 이제는 거기가 나옵니까? 학생이 일하다 죽었는데, 누구 하나 내 탓이라는 사람이 없어. 일을 시킨 사람도 거기에 가란 사람도”라며 한탄한다.
장학사는 “적당히 하십시다. 일개 지방 교육청 장학사가 뭔 힘이 있겠습니까. 그래서요? 이제 교육부 가시렵니까? 그 다음은요?”
장학사가 덧붙이 말은 참으로 가관이다. 아니 너무 현실적이라 몸서리쳐진다.
영화 관계자라면 ‘악의 평범성’ 속에 몰입되어 있으면 안 된다. 좋은 영화라면 스타 배우들도 독립영화에 출연해서 흥행되도록 그 힘을 보태야 한다.
소속사에서 원치 않는다는 핑계는 안 된다. 최소한 영화 예술인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
배우의 스타성은 독립영화가 성장하는 데에 큰 힘을 보탤 수 있다. 독립영화는 이 모든 것이 절실하다.
끝으로 한마디 더 보태겠다. <다음 소희>는 현재의 우리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보는 내내 힘들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마법처럼 무력감과 더불어 회심적 행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
여기에서 오는 영화적 카타르시스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작품을 봤을 때 느껴지는 예술적 감흥 같은 거다.
K-드라마에서의 주인공은 재벌 아들이거나 재벌 아들과 연애한다. 죽었는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아난다. 그것도 재벌 아들로 말이다.
주인공이니까 으레 그렇게 된다고 대중을 교육한다. 대다수의 대중미디어가 현실을 부정한다.
아니 외면하고 싶어 하는 대중을 가스라이팅 하곤 한다. K-드라마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소희>와 같이 리얼리티 넘치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이 영화와 이 영화의 메시지에 시네필과 평론가들이 지지하는 이유다. 이러한 영화적 시도를 영화계가 더 지원하고 더 많이 나오도록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
/디컬쳐 칼럼니스트 김진곤(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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