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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컬쳐

[칼럼]내 얼굴로는 울지 못하는 절망적인 아름다움

영화 <네 얼굴로는 울 수 없어>

칼럼니스트 김진곤 | 기사입력 2026/09/0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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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내 얼굴로는 울지 못하는 절망적인 아름다움
영화 <네 얼굴로는 울 수 없어>
기사입력  2026/09/07 [09:40]   칼럼니스트 김진곤

 

“사카히라...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진짜 너의 아버지 말이야.”

 

미즈무라는 당황스럽고 곧이어 슬픔이 밀려왔다. 사카히라로부터 전화왔을 때, 이미 미즈무라는 불안했을 것이다. 서로의 비밀을 15년 동안 가족에게도 숨기고 살던 사이었기 때문이다.

 

미즈무라는 영정 사진 앞에서 한참이나 기도를 하고 나니, 사키하라가 미즈무라를 빤히 쳐다본다. 미즈무라가 “왜?”라고 묻자, “한참을 기도하길래 우는 줄 알았어.”

 

“네가 울어 줬잖아. 내가 울어서 뭐해. 너는 좋겠다. 마음껏 울 수 있어서.” 미즈무라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울어도 돼.” 사카히라가 말한다. 

 

그러자 미즈무라가 화를 내며 “뭐? 어떻게 울어. 이 얼굴을 한 여자가 생판 모르는 남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울면 이상하잖아.”

 

내 얼굴로는 울 수 없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삶도 그런 것은 아닐까?

 

슬픔은 마음에서 시작되고 우러나는데, 그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얼굴이고, 그 슬픔을 표현할 권리(타인이 인정하는)는 얼굴이다. 슬픔의 주체는 ‘나’이지만, 정작 슬퍼하는 사람의 주체는 타인이 인식하는 ‘너=얼굴’인 것이다.

 

<네 얼굴로는 울 수 없어>에서 사카히라와 미즈무라는 15년 전에 몸이 뒤바뀐 사이였다. 열다섯 살의 사카히라와 미즈무라는 우연히 물에 빠진 뒤 서로의 몸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몸으로 15년을 살아간다. 

 

일반적으로 바디체인지의 이야기에서 몸은 곧 돌아가야 할 목표가 된다. 그것이 이야기의 동력이 된다. 잠시 다른 사람의 몸을 경험한 뒤 사건을 해결하며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돌아가지 못한다.

 

그렇게 15년간 바뀐 몸으로 살아갔다. 그 15년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고, 사랑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15년 동안 살아온 삶은 누구의 것인가? 몸의 원래 주인의 것인가? 아니면 그 몸으로 살아낸 사람의 것인가? 

 

이러한 질문의 방식과 영화적 탐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유사하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일까? 아니면 키워준 아버지가 아버지일까?

 

몸은 삶의 조건이다. 

영화보다 원작 소설은 훨씬 직접적으로 몸에서 시작한다. 미즈무라의 집에서 미즈무라의 몸으로 아침에 깨어난다. 그리고 그 날 남학생이었던 사카히라는 처음으로 생리를 경험한다.

 

그에게 그것은 단순히 ‘여자의 몸을 경험했다’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타임슬립하듯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몸의 시간에 편입되는 것이다. 

 

몸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결정한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어떤 시선을 받는지, 어떤 역할을 요구받는지.

 

우리는 자신의 몸을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태어난 뒤에는 그 몸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얼굴을 어떤 모습을 가졌는지에 따라 세상은 우리에게 다른 삶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의 ‘바디 체인지’는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몸이라는 조건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깊이 결정하는가를 보여주는 실험이다.

 

얼굴은 더 잔인하다. 

몸보다 더 잔인한 것은 얼굴인지도 모른다. 몸은 내가 느끼는 것이지만, 얼굴은 타인이 나를 알아보는 표식이기 때문이다. 

 

사카히라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러나 미즈무라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카히라는 마음껏 울 수 없었다. 사회적 통념이 그녀가 우는 것을 납득하지, 아니 용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판 모르는 남인 남자의 아버지의 죽음에 저 여자가 왜 슬퍼하지? 그것도 결혼한 여자가 남의 남자의 집에서’ 온갖 오해와 구설수는 그녀의 얼굴 때문에 결정지어진다. 

 

미즈무라의 감정은 진짜인데, 그 감정을 증명할 얼굴이 다르다. 그래서 ‘내 얼굴로는 울 수 없다’라는 말은 슬픔마저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절망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정말 자기 얼굴로 살고 있는 걸까?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정말 자기 얼굴로 살고 있는가?’

 

사카히라와 미즈무라는 정말로 서로의 얼굴을 빌려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얼굴을 빌리지 않고도 타인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기도 한다. 아버지로서의 얼굴, 어머니로서의 얼굴, 좋은 자식의 얼굴을 쓰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거울 속 얼굴이 나라는 이유만으로, 그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삶까지 정말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평범한 삶이란 자기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조금씩 잃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내가 원해서 선택한 것인지, 다른 사람이 원해서 선택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삶.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살아가다 어느새 너무 멀리 와버린 삶.

 

그래서 이 영화의 두 사람은 낯설지 않다.

 

작품 속 사카히라와 미즈무라는 타인의 몸으로 살아갔지만, 우리는 때때로 타인이 만들어준 나로 살아간다.

 

다시 물속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절망적인 순간은 두 사람이 서른 살이 되어 다시 물에 빠지는 장면이다. 

 


15살에 이 둘이 수영장 물에 빠진 것은 단순히 사고였다. 친구의 장난이었던, 사카히라가 밀려 물에 빠질 때 미즈무라를 잡았던, 미즈무라가 사카히라를 붙잡아주려 하다가 같이 빠지게 되었던 이 둘은 물에 빠졌고 그것은 사고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서로 몸이 바뀐 채 서로의 집에서 깨어난다.

 

물에 빠지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곤 한다. 그리고 물속에서 나오는 것은 다시 살아남, 생명의 탄생을 상징한다. 마치 엄마의 양수 속에서 세상 밖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15년이 흘렀다. 이미 서로의 삶을 살아버렸다. 처음 물에 빠졌던 소년과 소녀는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자신의 몸을 찾기 위해서일까, 이 방법은 이미 15년 전에 해봤던 방법이었다. 

 

그때 다시 돌아가기 위해 했던 수많은 방법은 모두 실패했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두 사람은 15년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끝내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른다.

 

남의 몸으로 살아온 삶. 

남의 얼굴로 살아온 삶.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생물학적인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자신을 한 번 죽여야 새로운 자신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처음의 물이 두 사람을 서로 바꾸어놓았다면, 마지막의 물은 두 사람이 다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들어가는 물이었으면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누구의 몸으로 돌아갈 것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15년 전의 몸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15년 전의 소녀 소년이었던 내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바뀐 몸으로 살아온 15년 동안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타인의 몸으로 경험한 삶도 결국 나의 삶이 된다. 그래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나를 선택하는 일인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순간을 통과한다.

 

내가 살아온 삶이 정말 나의 삶인지 의심하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어느 날 거울 속 내 얼굴을 보고도 내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얼굴이, 그리고 이 삶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묻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아주 조용히 물속을 바라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영화 <네 얼굴로는 울 수 없어>는 기미지마 가나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사카시타 유이치로 감독은 원작에 충실히 따르면서도 이 작품을 바디체인지의 로맨스 코미디로 소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풍부한 인간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접근해낸 완성도를 보였다. 

 

이 영화는 성별이 바뀐 두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라는 질문만이 아니라 갑자기 타인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그 몸이 요구하는 삶을 감당해야 하는 데에 더 큰 방점이 있다. 몸은 정체성인 동시에 삶의 조건이 된다. 

 

그렇게 영화 <네 얼굴로는 울 수 없어>는 몸이 바뀐 두 사람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자기 것이라고 부르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이야기로 읽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디컬쳐 칼럼니스트 김진곤(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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