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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종교체제로 운영되는 국가, 영화로 깨우침 얻을까?

영화<신성한 나무의 씨앗>

칼럼니스트 김진곤 | 기사입력 2025/05/24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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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종교체제로 운영되는 국가, 영화로 깨우침 얻을까?
영화<신성한 나무의 씨앗>
기사입력  2025/05/24 [12:37]   칼럼니스트 김진곤

인도 보리수는 '깨달음의 나무'다. 보리(菩提)라는 말 자체가 고대 인도어로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 

 

석가모니가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기에 신성시되었지만, 이 나무의 생존 방식은 역설적이다. 이 나무의 씨앗은 새의 배설물에 섞여 다른 나무 위에 떨어져 발아하고, 그 뿌리를 땅을 향해 자라나면 마침내 스스로 자립한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의 뿌리고 숙주 나무를 서서히 감아 올라가며 질식시킨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바로 이 보리수의 이중성에서 이란 사회의 비극을 발견했다. 종교라는 이름의 '신성함'이 어떻게 한 가정을, 한 사회를 질식시키는가를 말이다.

 

영화는 2022년 대규모 히잡 반대 시위가 일어난 테헤란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이만(미사그 자레 분)은 수사판사(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가지는 판사)로 진급하면서 체제의 수호자가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체제를 지키려는 그의 행동은 가족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수사판사가 되면서 가족을 지키라고 받았던 총 때문에 모든 사건이 벌어진다.

 

그 놈의 ‘총’ 때문이다. 이 총은 체제 수호의 상징이자 자유를 억압하는 상징이다.  

 

감독이 던진 질문은 명확하다. "나를 심문하고 눈을 가렸던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독재 시스템에 충성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나는 똑같이 할 수 없을까“

 

이는 단순히 이란만의 문제가 아니다. 12·3 비상계엄과 탄핵, 정치적와 종교적 분열로 혼란을 겪는 대한민국에서, 진실을 촬영하다 폭도로 몰린 한 영화감독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질문이다.

 

영화에서 가장 섬뜩했던 장면은 이만이 작은 캠코더로 가족을 심문하는 순간이다. 

 

아내를 작은 의자에 앉히고 심문한다. 카메라는 작은 캠코더와 캠코더 속에 보이는 나즈메(소헤일라 골레스타니 분)을 보여준다. 

 

큰딸(마흐사 로스타미 분)이 엄마를 변호하려다 이만에게 심문 받는다. 큰딸 레즈반은 심문의 의자에 앉기를 두려워한다. 

 

엄마는 이만이 흥분해 어떤 일을 벌일까봐 벌벌 떨며 딸을 이만의 말에 순종하도록 한다. 

 

한명씩 의자에 앉혀지는 아내와 딸. 국가와 종교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자행되는 가정 내 폭력. 관객은 뉴스를 통해서 본 IS의 무차별 살해 전 캠코더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만은 체제라는 보리수가 되어 가족이라는 숙주 나무를 조여 간다. 총 하나를 잃어버리면 3년 징역살이를 해야 하는 것이 두려운 수사판사. 가족의 더 큰 행복을 위해 각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진급. 

 

그러나 그가 집행하는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가족을 지켜야 할 가장이 오히려 가족을 억압하는 가해자가 되는 비극적 아이러니라니.

 

우리 모두는 어느 순간 체제의 일부가 되어 타인을 심문하고, 또 다른 순간에는 심문당하는 처지가 된다. 

 

영화는 햄릿의 연극처럼 현 사회의 자신을 비춘다. 진실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체제인가, 가족인가, 인간의 존엄인가?

 

영화를 본 후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이 영화는 종교 자체를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를 도구화하는 체제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보리수 아래서 석가모니가 얻은 깨달음은 자비와 해탈이었다. 그러나 체제는 그 신성함을 빌려 억압의 도구로 전환시킨다. 

 

히잡은 원래 여성의 정숙함과 존엄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체제는 이를 통제와 처벌의 수단으로 변질시켰다.

 

아침마다 기도하던 이만이 가족을 심문하는 장면에서도 그는 신앙인이 아닌 체제의 대리인으로 행동한다. 그가 외치는 것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국가의 법이다. 종교적 신념이 아닌 체제 순응의 논리가 그를 움직인다.

 

이는 전체주의 체제가 보이는 공통점이다. 종교든, 이념이든, 민족주의든 숭고한 가치를 전유하여 억압을 정당화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체제의 기생성이다. 신성한 것에 기생하여 자라나지만, 결국 그 신성함마저 질식시키는 체제의 본질.

 

라술로프 감독은 2024년 징역 8년과 채찍형을 선고받고 이란을 탈출했다. 그의 영화는 2024년 칸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체제는 감독을 질식시키려 했지만, 그의 작품은 오히려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영화의 생존자체로 보여준다. 체제가 심은 억압의 씨앗이 오히려 저항의 나무로 자라난다. 숙주를 죽이려던 기생식물이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이만! 너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야!"라고 관객들은 마음속으로 외치게 된다.

 

이 외침은, 결국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체제의 보리수가 되어 가족과 이웃을 질식시킬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깨달음의 나무 아래서 인간의 존엄을 지킬 것인가.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거울을 들이밀 뿐이다.

 

/디컬쳐 칼럼니스트 김진곤(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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