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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돼지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칼럼니스트 김진곤 | 기사입력 2023/12/2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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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돼지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기사입력  2023/12/20 [17:36]   칼럼니스트 김진곤

 

“돼지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누가 그래?”

“호리 선생님이”

 

영화 <괴물>에서 엄마 사오리(안도 사쿠라 분)와 아들 미나토(쿠로카와 소야 분)와의 대화이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 후한 초의 역사가이자 문학가인 반고가 쓴 <한서>에서  흉노족은 '얼굴은 사람이지만 성질은 흉악하여 짐승과 같다'라고 평한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중화사상의 시각에서 쓰인 문구이지만 사람으로서 도리에서 벗어난 인간을 짐승으로 비유하는 말로 지금도 쓰인다. 

 

최근에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서 많은 관객이 분노하며 떠올린 단어이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은 시내의 한 건물이 불이나 소방차가 긴급하게 사이렌을 울리면서 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불을 지른 자가 괴물일까?’ ‘방화사건 이야기일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관람을 시작한다.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교장선생님이 호리 선생을 사직시키며 한 대사다. 

 

감독은 영화 속 대사에서 알려준다. 지금 보이는 이런 장면(사실)은 편견의 시작이라고.

 

불을 구경하던 엄마와 아들의 대화가 진짜 영화의 이야기다.

 

아들 미나토가 엄마에게 ‘자신이 돼지 뇌가 들어있는 괴물이 아닌가’라고 의구심을 말하는 순간 엄마의 마음에 불이 나기 시작한다. 이게 진짜 불이다. 

 

어느 날, 집에 온 사오리는 미나토가 혼자 머리를 자른 흔적을 집 곳곳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학교 다녀온 아들이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오는가 하면, 상처 난 몸으로 귀에 붕대를 감고 오는 등 학교폭력이 의심되는 일들과 걱정이 이루 다 말할 나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범인을 찾았다. 아들의 이상한 행동과 말을 하게끔 심어준 괴물(범인)이 호리 선생이다. 아들 미나토가 그렇게 지목했기 때문이다.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고 있는 싱글맘인 사오리는 혼자 학교로 찾아간다. 아들을 그렇게 만든 괴물을 찾아내기 위해서이다. 

 

커다란 학교 건물 주차장에 경차를 주차한다. 사오리는 불이 난 심경과 더불어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교장실을 찾아가자, 교장과 수 많은 남교사들로 둘러싸였다. 

 

왜? 누구냐? 라는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다. 

 

학교는 의례적인 사과로 일관하며, “호리 선생의 손이 아이의 코에 접촉되었던 일이 있었고, 그것을 사과한다”라고 말한다.

 

사오리는 이에 분노한다. 사오리가 알고 싶었던 진실은 왜 우리 아이가 학교폭력을 당했는 지? 누가 그랬는지?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호리 선생은 왜 내 아이인 미나토에게 돼지 뇌가 들었다는 폭언을 했는지? 등 수많은 의혹에 대해 진실 규명해 줄 것을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하고 호리 선생의 변명만 듣고 끝나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사오리는 학교를 두 번, 세 번 찾아가 진실을 요구하며, 호리 선생이 유흥업소인 걸스바에 다닌다는 말까지 학교 측에 전달하며 대응하지만, 학교에서는 호리 선생을 학교에서 사직시킴으로 일을 마무리한다.

 

여기서 관객은 답답함과 분노가 일어날 수 없다. 이런 모습이 일본의 사회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다.

 

이 답답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소통이 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학교 측 입장에서 보면, 학부모의 문제 제기가 있었고 이에 교장이 학교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교장은 교사를 책임지고 사임시키는 것으로 민원해결, 일 처리 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이거 얼마나 정치적인 행위로 보이는가? 다른 곳도 아닌 학교라는 곳이!

 

‘소통’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쌍방향성을 가지고 평등과 존중이 기반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같은 말을 쓰더라고 각 개인이 쓰는 언어의 차이도 있고, 결정적인 것은 쌍방이 권력과 역량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사오리는 학부모이고 아이에 대한 피해대책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소통이 잘 되기 위해선 권력이나 역량이 낮은 쪽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능력을 같이 쓸 수 있도록 풀어나가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소통이 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권력자가 권력으로 눌러서는 안 된다.

 

관객이 영화를 보며 분노하는 이유는 권력으로 누른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주욱 둘러서서 고개 숙이는 장면은 철옹성 같은 벽을 느끼게 해줄 따름이다. 그들은 성문을 열 마음이 없다.

 

최근에 학교와 학부모의 갈등이 심하다. 사오리와 호리 선생, 학교에서 보듯이 학부모가 교사의 ‘갑’이 될 수 없고, 학교가 교사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가 되어서는 갈등만 야기될 뿐이다.

 

방법은 첫 번째도 소통이고 두 번째도 소통이다. 

 

소통이 가능하려면 권력과 역량이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이어야 한다. 

 

영화 <괴물>은 총 3부로 구성된 영화다. 1부는 사오리의 관점, 2부는 호리선생의 관점 3부는 미나토의 관점으로 되어 있다. 

 

각각의 인물에 따라서 벌어지는 시각과 편견으로 괴물을 찾아 마녀사냥을 하고자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마음과 생각에 산사태와 폭우로 철퇴를 내린다. 

 

적대관계로 알았던 미나토와 요리에 대하여 3부에서 그 편견이 무너지게 된다. 

 

미나토와 요리는 서로 키도, 힘도 다르지만,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한다. 

 

이 둘은 버려진 기차를 아지트로 사용한다. 여기서 서로를 우정을 키워 나간다. 

 

사오리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괴물’, 호리 선생이 오해했던 말. 

 

“怪物はだれだ (카이부츠와다레다)”

 

아이가 부르던 ‘카이부츠와~다레다! (괴물은 누~구게!)’는 사실 미나토와 요리가 놀던 게임이다. “괴물은 누구지?”라며 스무고개 하듯이 답을 맞히는 이들의 놀이다.

 

이 아지트에선 이들만의 소통의 방법이 있고, 이들의 미래와 꿈이 있다. 이 공간에 오면 추억이 쌓이고 행복이 있다. 

 

지금 이 시대엔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소통의 아지트가 절실해 보인다.

 

/디컬쳐 칼럼니스트 김진곤(영화감독)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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