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살레스 감독의 <아임 스틸 히어>(원제 : Ainda Estou Aqui)는 단순한 전기 영화를 넘어, 한 가족의 개인적 비극을 통해 국가적 폭력과 기억의 상실에 맞서는 거대한 투쟁을 펼치는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개인의 기억이 어떻게 국가의 역사로 승화 되는지를 깨닫게 한다.
월터 살레스, <아임 스틸 히어>가 건네는 숙제
영화는 1970년 브라질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희생된 루벤스 파이바 의원를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은 브라질 군사정권이 반정부 인사들을 대상으로 자행했던 정치적 숙청, 불법연행, 고문, 실종, 그리고 죽음의 아픈 역사였다.
영화는 시대적 폭력 속에서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이 절망에 빠지지 않고 진실을 찾기 위해 투쟁하며, 잃어버린 가족을 기억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남편을 잃은 아내나 아버지를 잃은 가족의 고통을 과장하거나 신파적으로 그리지 않고, 자녀들 앞에서 묵묵히 버텨내는 어머니 유니스의 강인함을 통해 '기억'이라는 행위 자체가 곧 '저항'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임 스틸 히어. ‘나는 아직 여기 있다’는 원제는 사라진 아버지의 외침이다. 나는 아직 가족 속에 있고, 역사 속에 있다. 그리고 가족의 기억 속에 있고, 역사의 기억 속에 있다는 외침이다.
역사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다짐이 된다. 이 영화는 잊혀지는 것을 거부하고, 기억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호소한다.
슈퍼 8mm 필름으로 구현하는 기억의 질감
월터 살레스 감독은 1970년대의 기억을 시각화하는 방법으로 슈퍼 8미리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다. 실제 영화 속에서도 8mm 카메라로 촬영하는 장면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를 통해 과거의 한 순간이지만 행복했던 가족을 따스한 빛과 색감으로 그려냈다.
또한 이 거친 입자와 불안정한 화면으로 오래된 가족 앨범이나 빛바랜 기억 속 한 장면을 생생하게 관객과 공유한다.
이는 영화가 단순한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기억의 복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실을 뒤섞으며, 기억이 단단한 실체가 아니라 언제든 부서지고 변형될 수 있는 연약한 것임을,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불안정한 화면을 통해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또 하나의 미학적 선택은 감정의 절제였다. 감독은 노년에 알츠하이머를 앓는 어머니 유니스(페르난다 토레스 분)의 고통스러운 순간이나, 아버지의 실종 소식을 접하는 가족들의 눈물 어린 장면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묵묵히 길을 걷거나, 서류를 정리하고, 아버지가 없는 식탁에 앉아있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절제된 연출은 신파극의 감정적 과잉을 피하고, 관객들이 인물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침묵의 슬픔과 강인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인물에게서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느끼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강한 저항의 의지를 읽어낸다. 이는 한(恨)이라는 정서를 통해 비극을 다루는 한국적 정서와도 깊게 맞닿아 있어, 우리에게 공감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의 기억들, 그리고 한국영화의 부재
영화를 보고 있으면, 한국의 과거사가 자연스럽게 겹쳐서 떠오른다. 우리 역사에도 군부독재 시대가 있었으며, 과오를 은닉하고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가슴 깊이 각인된 아픔들이 있었다. 세월호가 그랬고, 이태원 참사가 그랬고, 최근엔 무안 국제공항 사고가 있었다.
브라질의 과거와 너무도 흡사한 동백림 사건도 있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과 4.3사건까지.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하고 유린된 희생과 사건들은 우리 가슴 한편에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그런데 정작 이런 기억을 월터 살레스만큼 섬세하고 깊이 있게 다루는 한국 영화는 어디에 있을까? 천만 관객 동원이라는 숫자에 매몰되거나, 화려한 액션과 스펙터클에만 골몰하고, K-컬쳐라는 한류에 취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달려온 지금의 한국 영화는 성공보다는 망해가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한국 영화가 사회적 주제를 아예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자극적 소재로 소비되거나, 단순한 선악 구조로 치환되는 경우가 많다.
정작 깊이 있는 성찰과 창작의 작품은 사라지고 있다. 자본의 논리라며 심도 깊은 창작과 다양성 영화에는 투자되지 않고 제작이 사라지니 창작은 말라가고 있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러한 류의 영화는 한국 영화에서 소멸하고 있다.
반면에 <아임 스틸 히어>는 전 세계적 극장에서 한화로 500억 원 이상 매출이 나오고 있다. 곧 한국에서도 개봉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상업적 성공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극장은 상업적이지 않다는 이상한 이유로 외면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영화를 살려야 한다며 할인권을 극장에 힘을 실어주는 저급한 정책에 정작 지원 받아야 할 영화인들은 울고 있고, 영화 창작자들은 외면받고 있다. 아이러니하다. 영화의 권력이 극장에 있으니 말이다.
<아임 스틸 히어>가 보여준 것 같은 깊이 있는 성찰,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관찰과 역사의 기억을 통한 영화적 기록이 필요한데 말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이 영화는 브라질의 특수한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 핵심에는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보편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아버지는 육체적으로 사라졌지만, 가족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며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어머니는 기억을 잃어가지만,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진실을 향한 투쟁의 의지만큼은 사라지지 않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는 결국, 존재의 증명이 물리적인 것이 아닌, 기억과 사랑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영원히 '여기'에 존재한다는 메시지다.
<아임 스틸 히어>를 보는 것은 단순히 영화 한 편을 관람하는 행위를 넘어, 역사의 증인이 되어 '기억의 연대'에 동참하는 중요한 경험이다. 이 영화가 슬픔을 직시하고 기억을 되살리는 용기가 어떻게 희망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술적 증언이다.
한국 영화가 이런 숙제에 응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도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여기 있습니다.’
/디컬쳐 칼럼니스트 김진곤(영화감독)